주요 대표작 40여점 펼쳐
정선 산수화 '연강임술첩'
10년만에 대중에 공개도
3월22일까지 강남구 S2A
조선시대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쓴 '대팽고회(大烹高會·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만남)' 옆에 윤형근 화백(1928~2007)의 추상화가 걸렸다. 수묵화에서 물감이 번지는 느낌을 청다색 기둥으로 표현한 'Umber-Blue'(1977)다. 서예와 사군자를 즐기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윤 화백은 생전에 "내 붓질의 뿌리는 추사 김정희에 있다. 추사의 필, 정확하게는 획을 긋는 법에서 배웠다"고 했다. 다시 시선은 겸재 정선(1676~1759)이 수묵담채로 수백 년 된 소나무를 힘 있게 그려낸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로 이어졌다.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을 이야기하거나 때로는 아무런 말없이 마음을 다스리듯 그려낸 이들의 작품은 시대를 건너 공명하듯 하나의 큰 울림을 줬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윤형근의 주요 작품을 서로 연결 지어 한자리에서 조명하는 기획전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이 서울 강남구 S2A에서 오는 3월 22일까지 개최된다. 3인의 회화와 서화 40여 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한국 미술사학자이면서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가 총괄 기획을 맡았다.
전시작들은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의 소장품을 기획 취지에 맞게 모은 것이다. S2A는 글로벌세아그룹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이다. 유 교수는 "18세기 최고의 화가인 겸재 정선과 19세기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 20세기 최고의 화가 윤형근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전시는 한마디로 최고들에 의한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만남"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한 사람(정선)은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또 한 사람(김정희)은 서예가 갖고 있는 다양한 예술 세계를 펼쳤다. 윤형근 선생은 반대로 극한의 미니멀리즘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며 "이처럼 작업 방식은 다르지만 그림과 글씨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필과 묵의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겸재 정선의 산수화, 화조영모화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또 추사 김정희의 대련, 횡액, 시고, 간찰 작품들을 시대별·형식별로 소개한다. 특히 추사의 작품은 간찰 39세(중년), 62세(제주 유배 시절), 71세(과천 시절) 등 시기별로 출품돼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절제된 추상미술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윤형근 화백의 작품도 226.8×181.5㎝ 크기의 대작 'Burnt-Umber'(1992)를 포함해 1970년대~1990년대 작품을 두루 아우른다.
특히 진경산수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정선의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10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겸재 노년의 명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정선이 1742년 양천현령을 지내던 67세 때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와 함께 임진강에서 뱃놀이를 한 뒤 이를 기념해 세 점을 그려 나눠 가졌던 것이다.
당대 조선시대 회화는 중국 화본(畵本)에 기초해 정형화된 관념산수화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정선은 이 같은 흐름에서 벗어나 직접 조국 산천을 누비며 그 아름다운 풍경을 생동감 있게 그리면서 자신만의 필법과 묵법을 구축해나갔다. 특히 소나무를 즐겨 그렸는데 중국 화본에는 나오지 않는 독특한 표현기법 덕분에 '겸재 소나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벗이었던 화가 조영석(1686~1761)은 "조선 300년사에서 이런 화가는 없었다"고 정선을 추켜세웠다.
추사 김정희 역시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고상하고 단정한 필체의 '그림 같은 글'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예술가다. 대구를 이루는 두 작품을 나란히 배치하는 대련(對聯)은 당대 추사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중국 명나라 시인 오종잠의 시 '중추가연(中秋家宴)'의 시구를 담은 '대팽고회'(1853)는 노년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大烹豆腐瓜薑菜(두부와 오이 생강 나물을 크게 삶아)/高會夫妻兒女孫(부부와 아들딸과 손자까지 다 모였네)'이라는 내용이다.
윤형근 화백의 작품은 대부분 리넨 유화지만, 묵색에 가까운 다색(암갈색)과 군청색의 단색조로 가장자리 물감이 리넨에 번져나간 형태가 동양의 수묵화를 떠올리게 한다. 유 교수는 "윤형근 선생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의 동양 미학과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했다"며 "동양 전통의 필획 조형미를 추구하면서 필과 묵을 최소화해 최대한의 조형 효과를 이끌어냈고, 그 미묘한 번짐 효과와 질감은 단순한 형식을 넘어 깊이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송경은 기자
- 입력 : 2025-02-09 16:57:28